초의스님께서 입적하시고 일지암은 다정(茶亭)이 서있던 연못과 주춧돌만이 남아
그 흔적을 남기며 백여년의 세월을 보냈다.
조선왕조가 무너지고 일제의 침탈과 더불어 우리의 차문화도 일본식으로 왜곡되고
변형된채
전쟁과 재건의 시간을 견뎌내면서 차는 사치스런 것으로 인식되고 커피가 차의
자리를
차지해 버린 시간이었다.
더불어 초의스님의 다선일여사상도 그 맥이 끊기는 듯 했다.
그러나 초의스님이 생전에 쓴 문집과 그 외 자료들을 토대로 일지암 복원에 대한
몇몇 차인들의 노력으로 1979년 일백여년전의 그 자리에 원형 그대로 복원되기에
이른다.
그후 용운스님과 여연스님의 그 맥을 이으며 지금에 이른 것이다.
해남을 지나 두륜산 대흥사에 이르면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오른편으로
다른 절에선 찾아 볼 수 없는 수많은 부도들을 볼 수 있다.
호국불교를 외치며 난세를 온몸으로 헤쳐 나갔던 서산대사가 묘향산에서 입적하면서
자신의 의발(가사와 발우)을 대흥사에 둘 것을 유언하였던 그때부터
대흥사에선 우리불교의 법맥을 잇는 대선지식들이 배출되었다.
그러하기에 대흥사의 부도전엔 서산대사와 초의선사를 비롯한 수많은 종사와 강사,
이름없는 선지식들의 사리탑이 무수히 서있는 것이다.
그곳엔 옛 선지식들의 향기가 넉넉히 배어 나와 둘러보는 이마다
참배의 예를 올릴 수 밖에 없다.
대흥사로부터 20여분을 숲속을 걸어 올라가면 그곳에 마침내 초의스님의 숨결이
남아있는
일지암에 도달한다.
일지암은 초당과 다정, 그리고 대웅전과 조그만 요사채로 구성되어있다.
현재의 일지암의 초당과 다정사이엔 철쭉나무한그루가 차나무들속에 우뚝서있다.
초의스님이 가꾸던 수많은 나무들중 하나였던 철쭉나무의 후손인 셈이다.
역사의 소용돌이속에서 초의스님이 우리에게 잊혀지지 않았듯이
철쭉나무는 그렇게 대를 이어 굳건히 살아 옛주인을 추억하고 있었다.
초당을 돌아 조그만 뒷켠엔 추사의 아버지가 초의스님의 인품을 칭송하며 지어준
‘성인을 기른다’는 뜻의 유천수란 이름의 샘물이 대나무 도롱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두 평 남짓한 초당안엔 추사가 초의스님에게 보낸 글이 판각되어 남아있고
초당의 기둥마다엔 초의스님의 다선일여사상이 녹아있는 동다송의 일부가
판각되어 있었다.
차밭이 따로있지 않은곳, 자연속에 야생차가 자유롭게 자라 일지암 주변을 휘돌아
초의스님의 자취를 남겨 그의 정신을 일깨우고 있는곳, 일지암.
그곳에 이슬비가 내린다.
해지는 일지암에서 내려다 본 저 멀리엔 해남땅과 그 너머의 바다가 운해속에
보일 듯 말 듯 멋을 더하고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와 이곳에서 자신이 걸어온 역사를
뒤돌아보듯 산맥은 중후한 멋으로 따스하게 일지암을 품어안고 있었다.
초의스님이 그를 찾아온 벗들과 담소하였을 다정에서 스님의 차정신을 생각하며
차를 마신다. 조용히 넘쳐흐르는 유천수로 끊인 차가 몸속을 적신다.
바람이 불때마다 풍경소리가 정겹다.
자 이제 초의스님과 함께 다정에서 차를 마셔보자.
스님께서 손수 따라주신 찻잔엔 적지도 넘치지도 않게 차가 가득하다.
스님은 더없이 따스한 웃음을 머금은 채 차를 권한다.
일상속에서 스스로에게 짊어지운 무거운 집착과 번뇌를 씻어내려는 마음으로 차를
마신다.
마침내 차는 온몸 구석구석을 정화한다.
이윽고 초의스님은 동다송 한구절로 다선일여를 우리에게 일깨우고
차한잔에 담긴 맛과 멋을 노래하신다.
옥화 한잔 기울이니 겨드랑에 바람 일어
몸 가벼워 하마 벌써 맑은곳에 올랐네
밝은 달은 촛불되어 또 나의 벗이 되고
흰구름은 자리펴고 병풍을 치는구나.
끝